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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관파천 러시아 공사관 건축가 영자신문으로 읽기

2020. 11. 2. 06:00성취(accomplishment)/영자신문 읽기(English newspapers review)

문화 섹션에서 가져온 코리아 중앙일보 영자신문 기사입니다. 한 러시아인에 대한 내용인데요. 긴 이름을 가진 그가 서울 한국에 건축적으로 영향을 주었다는 제목인데요. 그와 고종황제 그리고 명성황후와 관련된 역사의 한 부분을 알게 되어 도움이 되는 기사였습니다. 

I choose an article from cultural section of korea joongang daily. It is about a russian. He had a long name and gave an influence to korean architectural building. It was very informative to help me learn about part of history related with emperor gojong and empress myeongseong.

위의 사진은 러시아 공사관이(russia legation) 공사 중인(under construction)것을 보여줍니다.

그의 이름은 아파나시 세 레딘-사바틴입니다. 한자로 써진 그의 이름의 발음에서 "살파 정"또는 "살 파진"으로 조선시대 사람들에게 불려졌던 긴 이름을 가진 이 러시아인은 한국에 20년 이상을 거주했습니다.(resided in)

 

그가 그자신을 조선의 건축가로서 언급한 역사적 기록이 명시하듯이, (as historical records state that) 사바틴은 아마도 그의 한국이름을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1883년에, 그가 한국 건축의 현대화에 끼칠 영향 또는 고종황제의 부인인 명성황후의 암살을 일본이 인정하게 만들 영향에 대한 생각 없이, 사바틴은 23살의 젊은이로서 처음으로 조선땅에 발을 디뎠습니다.(stepped foot on joseon soil)

 

그의 초상화(a portrait) 입니다.

 

한국인들과 외국인들 둘 다 상대적으로 현대적인 서울의 출현에 대한 그의 참여가 익숙하지 않은 반면에, 사바틴은 1895년의 을미사변(eulmi incident)으로 알려진, 일본의 한국 마지막 황후 암살에(assassination of korea's last empress)  대한 핵심 목격자로 더 잘 알려져 있습니다.(is better known as key witness)

서울과 러시아 사이의 외교관계 30주년을 축하하며, 문화재청과 한국 러시아 대사관은 정동 덕수궁의 이전 왕족 도서관이었던(a former royal library) 중명전에서 특별 전시회를 준비함으로써 사바틴에 대해 설명하기로 결정했습니다. (Decided to shed light on)

 

 

"외교관계가 공식적으로는 30년 전에 시작되었지만, 우리는 우리의 우정이 조선과 러시아가 1884년에 상호 무역 조약을 맺은(signed a mutual commerce treaty) 이후에 시작되었다고 믿고 있습니다. 한국의 러시아 대사가 말했습니다." "러시아 건축가 아파나시 세 레딘 사바틴의 일과 인생의 제목으로, 전시회는 11월 11일까지 개장되며 무료입니다. 

 

첫 번째 한국으로 온 유럽인 건축가 사바틴

 

거의 20년을 그는 한국에서 살며, 둘 어느 학과목에서도(in either discipline) 어떠한 공식적인 자격을 가지지 않았음에도 그는 엔지니어와 건축가로서 일을 했습니다. 그는 서울에 있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서구 스타일의 건물들 중 몇몇의 디자인을 한 사람으로 추정되거나, (is presumed to be)  예전 러시아 공사관, 독립문, 관문각 (왕의 서재), 중명전, 규성현, 돈덕전, 정광헌, 서울의 손탁호텔뿐 아니라 제물포 (이제는 인천) 클럽과 러시아 영사관(russian consulate)과 같은 여러 개의 건물들의 건축에 적어도 참여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사진은 경복궁 안에 사바틴에 의해 디자인된 한국의 첫 번째 서구 스타일 건물인 왕의 서재인 관문각을 보여줍니다.

문화재청에(cha) 따르면, 대략 12개의 서구 스타일의 건물들이 사바틴의 작품으로 추정됩니다.

"오로지 두 개의 건물인, 러시아 공사관과 관문각이 사바틴의 작품으로 확인됩니다." 다른 10개의 건물들은 많은 조사자들이 그의 작품으로 믿지만, 그것을 증명할 역사적 자료들이 부족합니다." 

 

예전 러시아 공사관의 건축가인 것이 이미 이 젊은 러시아인을 비추기에 충분합니다. 그 당시 러시아 영사는 "이 젊은이가 궁 안에 있는 조선왕의 2층짜리 아름다운 건물을 지었다고 말하면서 , 사바틴을 공사 건물을 짓는데 추천했습니다. 비록 그가 건축가는 아니었지만, 독학을 통해서 (through self-study) 건축에 필요한 지식을 배웠던 부지런하고 (industrious) 예의 바른(decent) 사람이었습니다.

 

사바틴을 광범위하게 연구해온 교수에 따르면, 러시아 공사관은 정면은(facade) 유럽 스타일로 보이는 반면에 몇몇 방들의 배경이 매우 동양적이어서 서구와 전통 스타일이 잘 혼합되어있다고 말했습니다. 

 

침실과 주방의 장식은 유럽 스타일인 반면 응접실은 동양적이라고 연구서에 집필했습니다. 현대적인 첫 번째 공공건물(public building)이자 최상류 층의 대저택 (mansion) 일 뿐만 아니라 또한 고종황제가 다급하게 피신을 했던 (took his desperate refuge)기 때문에 이 러시아 공사 건물은 중요합니다.(significant)

 

1896년 2월 11일 아침, 해가 떠오르기 전, 황제와 세자는 경복궁에서 그 당시 경운궁으로 알려진 덕수궁을 지나서 대략 1킬로미터의 여정을 떠났고 (took about a one-kilometer journey) 러시아 공사관에 도착했습니다. 왕의 망명을 위한 노력이 오늘날 "아관파천"으로 언급됩니다. 비록 그 일이 굴욕적인(humiliating) 사건으로서 기억되지만 왕의 길로 알려진 탈출로의 일정 부분이 2년 전 복원되었습니다.. 러시아 공사관에서 왕과 세자는 대략 1년을 머물렀습니다.

 

한국전쟁 동안 붕괴된 후 오늘날은 단지 건물의 탑 부분만이 살아남았지만 , 방문객들에게 왕의 길을 걸어서 중명전에 도착해 전시회 감상하기 그리고 전시회후에 러시아공사관 둘러보기를 추천합니다. 

 

핵심 목격자

방문객들이 중명전 안에 전시실에 들어가면 일본인들이 명성황후를 찾는 다급한 소리를 들을 수 있는데요. 이 시끄러운 소리는 그 당시 경복궁 안에서 경호로 일을 하고 있었던 사바틴이 1895년 10월 8일 새벽에 잠에서 깨어났던 소리였습니다.

 

왼쪽은 명성황후가 암살당한 아침을 묘사하기 위해 사바틴이 손으로 그린 경복궁 지도입니다. 오른쪽은 사바틴이 일본이 명성황후 암살에 대한 책임을 지도록 한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사건을 손으로 쓴 증언입니다.

 

고종황제는 매우 걱정을 해서 미국인 대령 윌리암과 사바틴을 일본군에 대항하여 궁에서 보초를 서는 한국 군인들의 선두로 지명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얼마나 고종황제가 걱정을 해서 그의 좋은 건축가 친구인 사바틴을 궁의 경호원으로서 지명했었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1894년 9월 이후로, 사바틴은 궁 안에서 저녁 7시에서 다음날 아침까지 경호를 했습니다. 사바틴은 그때 궁에서 보초 근무를 섰고 (sabatin was on sentry duty) 그날 아침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목격했습니다.

 

대략 20에서 25명의 암살자들이 명성황후가 거주했던 곤녕합에 침입해(broke into) 황후를 찾아다녔습니다.

그가 멀리서 그 사건을 보고 있을 때, 그들이 다가와 황후가 어디에 있는지 자백하라고 그에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는 모른다고 하고 가까스로 나와 보고했습니다.

 

"그가 결정적인 암살 순간을 목격했다고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에 대해서 의구심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조사자료에 따르면, 사바틴이 암살을 목격했던 것은 분명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인정을 하면 그는 아마도 죽었을 것입니다."

그가 암살을 목격했던 아니던, 그의 그날 아침에 대한 자세한 보고 덕택에, 황후 암살을 부인했던 일본은 결국 살인을 인정해야 했습니다.

 

 

"한국인들이 사바틴과 그에 위대한 작품들에 대해 알게 하기 위해서 가능한 한 많은 정보들을 함께 모으기를 바라며, 우리는 말 그대로(literally) 이 전시회를 기획하기 위해서 역사 기록들을 샅샅이 뒤졌습니다.(rummaged through)  

전시회는 11월 11일까지 진행됩니다.